두타산 삼화사 - 3 > 사찰의 향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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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타산 삼화사 -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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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정암사 작성일11-07-20 13:45 조회10,728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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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물 1227호 삼화사 삼층석탑

천년고찰 삼화사에는 삼층석탑이 있다. 법당 앞에는 고색이 창연하고 이끼가 가득한 옛 석탑이 하나 서 있는데 그 모습이 자못 범상치 않다. 규모는 3층으로 높이는 4.7m이다.
이 탑은 삼화사가 오랜 풍상을 겪으면서 소멸과 중건을 반복해 온 것과는 달리 비교적 원형 그대로 잘 보존되고 있어서 어느 절의 어떤 탑과 비교를 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다. 이 탑의 구조와 상태를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우선 아래쪽부터 보면 지대석(地臺石)은 남북으로 장대석(長大石)을 놓고 동서로는 그 사이에 끼도록 된 4매석(枚石)으로 구성하고 있다. 하대석과 중석은 돌 하나로 깎아서 5매석으로 하부기단을 만들었다. 하부기단에는 4우주(隅柱)와 각 면에 한 개씩 탱주를 세웠다. 갑석(甲石)은 평평하고 얇은 2매석으로 되어 있고, 윗면 중앙에 4분원(分圓)의 고임이 있으나 손상이 심한 편이다. 상부기단의 면석은 각면을 돌 하나로 구성하였고 우주와 탱주가 표시되어 있다. 대기단(大基壇) 갑석은 한 장으로 된 판석(板石)인데 윗부분에 경사가 있고 4분원은 고임이 조각으로 나타나 있다. 그 위로는 윗면의 4분원의 고임이 있고 아랫면은 안쪽을 곡선으로 깎은 별석(別石)을 끼워 탑신을 받치도록 하고 있다.


다음으로 탑신을 살펴보면 옥신과 옥개(屋蓋)는 각각 한 개의 돌로 이루어져 있다. 초층탑신은 거의 입방체에 가깝고 4우주가 표시되어 있으나 약간의 손상이 있다. 2층과 3층의 탑신은 초층에 비해 조금씩 줄어들어 아름다운 균형을 이루고 있다. 다만 3층탑신이 크게 손상되었고 2층탑신은 두 조각으로 갈라져 안타까움을 더해 준다. 옥개석은 받침이 각 층마다 사단으로 되어 있으며 큰 면이 탑신을 받치고 있다. 이들 옥개석의 배치는 초층이 2단이고 2층과 3층은 1단이다.
마지막으로 상륜부(上輪部)를 살펴보면 긴 찰주(擦柱)가 남아 있으며 여기에는 상륜의 노반(露盤)과 복발(覆鉢), 보륜(寶輪)이 꽂혀있다. 또 따로 다섯 개의 철환(鐵環)도 남아 있는데, 이는 보륜과 보륜 사이에 끼웠던 것으로 보인다. 찰주 정상에는 보주(寶柱)를 나타내는 주물로 만든 철주가 꽂혀 있다.


이 석탑은 기단부와 상륜부가 특히 손상이 심할 뿐이고 나머지는 대체로 원형을 알아보는 데 지장이 없다. 또 초층탑신 밑에 별석의 받침을 끼워 시대적인 특색을 나타내고 있는데, 이는 신라석탑 이후에 나타나는 전형적인 모습이다. 따라서 삼화사 삼층석탑의 건립시기는 늦게 잡아도 신라말로 추정된다.
1967년 이 탑을 실측 조사한 신라오악학술조사단은 보고서를 통해 ‘삼화사 삼층석탑은 동해안 지방에서는 보기 드문 수작'이라고 평가하면서 그 예술적·문화재적 가치를 인정했다. 이를 바탕으로 이 탑은 1990년 5월 강원도 문화재자료 113호로 지정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등급은 1997년 6월 이 탑을 중건 이전하는 과정에서 사리함과 소탑이 발견됨으로써 학계로부터 비상한 관심을 모으며 보다 높은 위상으로 재평가되었다.


불교미술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각기 절대연대를 가지고 있는 유물 유적의 발견이다. 모든 연대추정은 이 유물에 의해서 결정되는데 삼화사 석탑은 그 증거들을 보여 줌으로써 스스로 신라시대에 조성된 탑임을 입증한 것이다.
삼화사 삼층석탑이 현재의 장소(중대사터)로 옮겨진 것은 1979년 12월이었다. 삼화사가 쌍용양회의 채광권 안에 위치함으로 해서 더 이상 사찰로서의 역할이 어렵게 되자 1977년부터 이전사업을 시작한 끝에 마지막으로 탑을 옮겨온 것이다. 이때 이 탑은 법당 앞마당이 아니라 화단 왼쪽에 세워졌다. 이 탑을 다시 현재의 자리로 이건한 것은 삼화사를 옛 모습에 가깝도록 복원하려는 자광 원행(慈光 遠行)화상의 원력에 의해서이다. 스님은 우선 관계 전문가의 자문을 얻어 천년석탑의 자리를 다시 선정했다. 당시 자문에 응했던 전문가들은 이 탑이 공양탑이 아니라 불탑으로 조성된 것이란 점을 들어 가람의 중심이 되는 곳으로 옮길 것을 제안했다. 현재 삼화사의 가람배치상 중심이 되는 곳은 큰법당 아래 마당이다. 그리하여 당국의 승인을 얻어 이건에 착수한 것이 1997년 4월초였다.


삼화사는 먼저 탑이 위치할 장소에 사방 3.2m, 깊이 1m의 흙을 파낸 다음 굵은 마사와 적심석으로 지반을 다진 뒤 기단은 지면보다 약간 높게 하는 기초작업을 했다. 이어 4월 25일부터 석탑의 해체작업에 들어갔는데 여기에서 뜻밖의 소장품들이 쏟아져 나왔다. 당초 관계자들은 이 탑을 이전한 지가 열여덟해 정도밖에 되지 않았으므로 소장유품이 없을 것으로 생각했으나 상층기단부 중심부에서 목제함과 납석제 소형탑 25기, 청동제 불대좌편(佛臺座片) 2개, 철편(鐵片) 6개가 쏟아져 나왔다. 이중 소형 납석제탑은 원형이 거의 없고 파손된 것이 많았으나 그것들은 모두 통일신라시대 석탑에서 나오는 것들이었다. 이것들은 이 탑이 1979년 이건될 때 발견된 것을 그대로 부장한 것이었다.
삼화사는 이중 철편은 철불의 파편으로 보고 철불 복원때 제자리를 찾기로 하고 나머지는 다시 안치했다. 이와 함께 원행화상이 봉안하고 스리랑카에서 모셔온 사리 1과(顆)와 불자들의 공양물들을 사리함에 넣어 초층탑신 사리공내에 봉안했다. 이 이건불사가 완료된 것은 1997년 5월 4일이었으며 봉탑낙성법요를 거행한 것은 그 해 부처님 오신날이었다. 현재 국가 지정문화재 보물 제 1277호(1998. 6. 7)로 지정되었다.


여기에서 특별히 주목되는 점은 이 탑에서 통일신라시대 석탑에서 나오는 부장물들이 나왔다는 사실이다. 이것들은 이 석탑의 조성연대를 통일신라시대로 잡는 결정적인 자료가 되었다. 이와 함께 다시 검토된 양식적 특성도 주목된다. 이 탑은 기단부, 탑신부, 상륜부 등 석탑을 이루고 있는 세가지 구성요소가 그대로 남아 있을 뿐만 아니라, 기단부의 구성과 특히 탑신부의 굄대를 별석으로 만들어 끼운 점, 그리고 각 탑신석과 옥개석의 조성양식과 수법 등이 매우 균정하고 단아하다. 이는 신라석탑의 특징 가운데 하나라는 것이 학자들의 견해이다. 따라서 전문가들은 이 탑의 조성 연대가 늦어도 9세기 중엽이라고 최종적인 단정을 했다.
삼화사 석탑의 조성연대가 이같이 상향조정된 것은 이절의 철불 제작연대가 명문의 발견으로 상향 조정된 것과 함께 삼화사의 역사적 가치를 높이는 또 하나의 자료라는 점에서도 의미 있는 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http://www.samhwasa.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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