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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허스님 탄생 9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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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정암사 작성일12-04-28 18:57 조회13,834회 댓글1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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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허 스님 탄생 99년

17년 걸려 ‘화엄경’ 최초 완역 유·불·도 삼교에 통달 전란·공비 난입 족집게 예언도


이범진 차장대우
photo 조선일보DB
내년은 탄허(虛) 스님 탄신 100주년이다. 1년이 남았는데 탄허 스님에 대한 책도 시중에 나왔다. 그의 사상과 철학, 한반도에 대한 예언이 담긴 책 ‘탄허록’(도서출판 휴)이 4월 5일 발간됐다. 탄허 스님(1913~1983)은 불교계의 대선사이자 대학자, 선각자다. 특히 화엄경을 최초로 번역한 걸로 명성이 높다. 화엄경은 선(禪)의 전통을 강조하는 한국 불교에서 가장 중요한 경이라고 얘기된다. 신라 때 원효, 의상이 화엄경 박사였다.

탄허 스님은 독특한 예측력으로도 화제가 됐었다. 그는 강원도 오대산 중대암에서 수도생활을 하던 1949년 법당 뜰에 개미 수백 마리가 떼로 죽어 있는 것을 봤다. 자기들끼리 싸움을 한 결과였다. 스님은 이를 보고 난(亂)을 예감, 짐을 챙겨 사흘 만에 경남 양산 지산리의 통도사 백련암으로 자리를 옮겼다. 이듬해 6·25가 터졌다.


독립운동가의 둘째아들

강원도 울진·삼척에 북한의 무장공비 120명이 침투했던 1968년에도 유사한 일이 있었다. 당시 스님은 오대산 월정사에서 ‘신화엄경합론(新華嚴經合論)’을 번역하고 있었다. 그런데 부랴부랴 짐을 싸라고 하더니 장서(藏書)와 번역 원고들을 모두 삼척 영은사로 옮겼다. 사람들이 대체 웬일인가 하며 웅성거렸다. 원고를 모두 옮긴 지 15일 뒤인 그해 11월 울진과 삼척에 무장공비가 침입했다. 진압작전에 흩어진 공비들은 오대산 일대로 도망쳤는데 이를 소탕하기 위한 군단 사령부가 하필 월정사에 설치됐다. 삼척 영은사에서 한 달가량 머물던 스님이 돌아와 보니 월정사는 암자 주변에 온통 참호가 파인 채 폐허처럼 변해 있었다. 스님이 원고를 삼척으로 옮겨 놓지 않았더라면 ‘신화엄경합론’ 번역은 빛을 보지 못했을지 모른다.

탄허 스님은 일제 치하였던 1913년 지금의 전북 김제시 만경읍 대동리에서 독립운동가인 율재(栗齋) 김홍규(金洪奎)의 둘째아들로 태어났다. 불교에 입문하기 전 기호학파 최익현(崔益鉉)의 문파에서 한학(漢學)을 공부했으며 도학(道學)에도 상당한 경지를 이뤘다. 초대 조계종정 한암 스님과 20여통의 서신을 주고받은 그가 강원도 오대산 상원사에서 출가한 것은 22세이던 1934년이다. 그는 출가 이듬해인 23세 때부터 스님들에게 불경을 강의했다. 이후 3년간 묵언(默言) 참선으로 용맹정진한 스님은 훗날 조계종 종정이 되는 고암·탄옹 스님의 요청을 받고 26세부터 불교의 정수인 화엄경 강의를 시작한다. 당시 탄허가 15년간 오대산 경내에서 칩거한 얘기는 유명하다. 이때의 인연으로 탄허는 1957년부터 화엄경 번역을 시작, 한자 100만자(범어 10조9만5048자)에 이르는 방대한 이 불경의 ‘정수’ 80권을 17년 뒤인 1974년 한국어로 완역했다.

탄허 스님은 1967년 조계종 초대 중앙역경원장을 지내며 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의 한글 번역 작업에도 투신했다. 그는 일본 도쿄대학 화엄학 특강, 국립타이완대학에서 비교종교 특강을 하며 주변국에서도 명성을 얻었다.

그의 제자이자 사위인 서우담 화엄학연구소장은 주간조선에 “화엄경은 한문으로 된 경전 원본만 80권에 달한다”며 “스님은 원본 80권과 화엄경의 대의(大義)를 담은 화엄경론 40권, 해석을 담은 화엄경소초 150권을 하나로 합쳐 자국어로 번역한 최초의 인물”이라고 말했다. 탄허 스님은 이 방대한 화엄경을 17년간 매일 원고지 100장씩을 번역하는 초인적 작업 끝에 총 6만2500장 분량의 ‘신화엄경합론’이란 제목으로 1974년 발간했다. 이 작업은 원효·의상 이래 최대 불사 가운데 하나로 평가받고 있다.

탄허 스님은 승려이지만 불교에 국한되지 않고 유교·도교·불교와 한학·주역을 아우르는 선각자이자 경세가였다는 평가를 받았다. 스스로 ‘국보’임을 자처했던 국문학자 양주동(1903~1977) 박사는 탄허 스님으로부터 ‘장자’ 강의를 들은 뒤 “장자가 다시 살아 돌아와도 탄허보다 잘할 수는 없을 것”이라 극찬했다. 당대 최고의 석학으로 꼽혔던 함석헌(1901~1989) 선생 역시 스님을 자주 찾아 동양학을 물었다고 한다.


대변혁기 정치가 역할 강조

탄허 스님은 “대변혁의 시기에는 정치가의 역할이 막중하다”고 했다. “그들의 손에 우리나라의 흥망성쇠가 달려 있다”고 말한 바 있다. 그는 “흔히 정치인이 되면 세상 전부를 얻은 양 호령하는데 정치인은 나라의 어른이 아니라 심부름꾼”이라며 “대통령도 마찬가지로, 대통령은 세워진 기강에 따라 철학을 제공하는 사람이며 그 호령은 각계 지도자, 가정의 부모가 해야 한다”고 했다. “정치가 국민의 의사를 묵살하고 권력쟁취에 휘말려 싸우는 것은 귀신 혓바닥 장난보다 못한 짓”이라며 “정치의 본질은 그렇게 더러운 곳에 있지 않다”는 말도 남겼다.

그는 대한민국의 앞날에 대해 이런 말도 했다. “모두들 힘들다고 아우성이다. 하지만 우리가 겪는 이 고통은 산고의 고통이다. ‘주역’에 보면 한국은 간방(艮方)이다. 간(艮)은 갓난아기요, 결실을 의미한다. 바로 어머니가 아기를 낳을 때의 진통이다. 살이 찢어지는 고통을 겪어야 아기를 낳듯이 우리나라 1980년대 이전은 고통이 있을 수밖에 없는 때다. 그러나 이것은 희망찬 아픔이다. 가까이서 지켜보면 한심스럽고 어수선하고 머리가 아플 지경이지만 큰 안목으로 지켜보면 희망찬 미래를 엿볼 수 있다. 이 고통이 지나면 우리의 숙원이던 남북통일의 서광도 그 모습을 드러내 보이기 시작할 것이다.”

탄허 스님이 입적한 때는 1983년으로 오대산 월정사 방산굴(方山窟)에서였다. 세수(世壽) 70세, 법랍(法臘) 49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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