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신문 정암사 소개 (2012년 4월 17일) 0
 작성자: 정암사  2012-04-24 1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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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선 정암사
2012년 04월 13일 (금) 17:59:05 정선=최동진 기자 djchoi@ggbn.co.kr

‘제법무상ㆍ불생불멸’
진리 일깨우는 적멸보궁

신라 진평왕 때 한 사내가 있었다. 성이 김 씨인 그는 망국이긴 하나 진한(辰韓) 진골 출신으로 요직을 두루 거쳤다. 그러나 후사가 없었다. 우연히 접한 불교에 매료돼 천수관음에 귀의해 간절히 기도했다.
“사내아이를 낳으면 시주해 불법의 바다에 나루터로 삼겠습니다.”

그의 아내는 별이 품 안으로 떨어지는 꿈을 꾸고 바로 임신해 아이를 낳았는데, 석가모니 부처님과 생일이 같았다. 그래서 선종(善宗)이라 이름 붙였다.

선종은 부모의 죽음을 보고 세상살이의 번잡함에 염증을 느껴 처자식을 버리고 출가한다. 전 재산을 털어 사찰을 세우고, 가시덤불 속에서 머리카락을 들보에 묶은 채 밤낮으로 수행에 매진한다. 마침 재상 자리가 비어 왕이 여러 차례 임명했으나 “하루 동안 계율을 지키다 죽을지언정, 파계해 100년 동안 계율을 어기며 살지 않겠다”며 나아가지 않았으니, 그가 바로 한국불교의 계율을 세운 자장(慈藏)율사다.

자장율사의 이야기는 〈삼국유사〉 곳곳에 나온다. 황룡사 9층탑 관련 조와 진신사리 영험담 등에도 등장하지만, 앞서 언급한 율사의 탄생배경을 비롯해 생애 및 업적은 ‘자장이 계율을 정하다[慈藏定律]’조에 상세히 언급된다.

율사는 선덕여왕 3년(636년)에 당나라로 유학을 가 청량산 만수대성(曼殊大聖) 소상 앞에서 기도하던 중 문수보살로부터 게(偈)를 받았다. 문수보살이 읊어준 범어를 해석하지 못하고 있는데, 다음날 낯선 스님이 찾아와 이를 해석해주고 가사와 사리를 전했다. 이후 유학 7년 만인 643년 선덕여왕의 청으로 신라로 돌아오면서 사리 100과와 부처님 가사를 비롯해 대장경과 여러 번당(幡幢), 화개(花蓋) 등을 가져왔다.

귀국 후 대국통(大國統)이 돼 황룡사 9층탑을 세웠으며 불가의 규범을 바로잡았다. 또 귀국할 때 모셔온 사리는 황룡사탑과 울산 태화탑, 통도사 금강계단에 나눠 봉안하고, 부처님 가사는 통도사에 모셨다. 통도사가 삼보사찰의 으뜸인 불보종찰로 불리게 된 까닭이다.

통도사 외에도 자장율사가 창건한 사찰은 10여 곳에 이른다. 말년에 통도사를 떠나 세운 동해 수다사(지금의 등명낙가사) 등이 그곳이다. 정선 정암사 역시 율사가 창건한 절이지만, 이곳이 갖는 의미는 여타 사찰과는 사뭇 다르다. 문수보살에게 직접 자리를 지정 받았을 뿐 아니라, 율사가 말년에 수행하다 입적한 곳이기 때문이다. 이런 까닭에 이곳에 자장율사가 최후까지 입었던 가사가 전해졌으나, 1975년 11월 도난당했다고 하니 애석할 따름이다.

▲ 정암사 극락교를 건너면 나오는 주목과 적멸보궁. 자장율사가 꼽은 주장자가 살아났다는 주목보다 나무 아래의 작은 불상들과 탑이 아이들의 관심을 끈다.

정암사 창건담과 자장율사의 최후는 ‘자장정율’조에 매우 자세하게 묘사돼 있다.

자장율사가 수다사에 기거하던 중, 중국 청량산 북대에서 본 문수보살이 꿈에 나타나 “내일 대송정에서 만나자”라고 말한다. 율사가 그곳에 다다르니 “태백산 갈반지(葛蟠地)에서 다시 만나리라”하고는 사라졌다. 태백산에 이르러 칡넝쿨이 서린 곳을 찾다 나무 아래 커다란 구렁이가 똬리를 틀고 있는 것을 보고, 그곳을 갈반지로 판단해 석남원(지금의 정암사)을 세웠다.

율사가 그곳에서 성인을 만날 것을 고대하며 기도하던 어느 날, 남루한 옷을 입고 삼태기에 죽은 개를 담아 멘 늙은이가 찾아와 “자장을 보러 왔다”고 한다. 율사를 따르는 이들이 “감히 스승의 이름을 부르는 이를 본적이 없다”며 거절했다. 하지만 “스승에게 전하기나 하라”는 거지노인의 위엄 서린 말에 시자들은 자장에게 사실을 전했는데 그조차도 “잘 타일러서 보내라”며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러자 거지노인이 “아상을 가진 자가 어찌 나를 보겠느냐”고 크게 꾸짖은 뒤 삼태기를 거꾸로 쏟자 죽은 개가 사자로 변했고, 노인은 사자보좌를 타고 광채를 발하며 허공으로 사라졌다.

시자로부터 이 광경을 전해들은 자장은 그제야 거지노인이 문수보살의 현현임을 깨닫고 빛을 쫓아 남쪽고개에 올랐지만 따라갈 수 없었다. 그토록 고대하던 성인과의 만남이 자신의 아상에 의해 무산됐음을 탓하다 그대로 쓰러져 죽었다.

태백산 정암사는 이렇게 부처님 진신사리를 모신 적멸보궁이라는 명예와 더불어 자장율사의 한을 간직한 곳이다. 중앙고속도로 제천IC를 나와 영월방면으로 38번 국도를 타고 가다보면, 강원랜드를 지나 싸리재를 가는 중간에 안내석이 나온다. 이곳에서 우회전 해 10분 정도 들어가면 정암사다.

하지만 자장율사가 걸었을 것으로 생각되는 태백에서 만항재를 넘어오는 코스를 택했다. 만항재는 해발 1,313미터로 우리나라 포장도 중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고갯길이다. 고지대이고 눈이 많이 오는 특성상 3월 31일까지 차량 출입이 통제된다는 사실을 몰랐지만, 4월 1일 이곳에 도착한 덕에 그 길을 갈 수 있었다. 출입통제는 해제됐지만 양옆으로 쌓여있는 눈과 중간마다 나타나는 설 녹은 빙판으로 긴장한 채 20분 정도 내려오니 오른편으로 정암사가 모습을 드러낸다.

양산 통도사ㆍ설악산 봉정암ㆍ오대산 중대ㆍ영월 법흥사와 더불어 5대 적멸보궁으로 꼽히지만 명성과 달리 단출하고 소박하다. 일주문을 들어서면 인심 좋게 생긴 포대화상이 순례객을 맞는다. 얼마나 많은 이들의 손길을 탔는지 배와 가슴 부분이 반질반질하다. 새롭게 불사를 끝낸 목우당을 지나면 관음전과 육화정사, 요사채가 나온다. 천연기념물 제73호로 지정된 열목어가 사는 개천 위 극락교를 건너면 자장율사가 꼽은 주장자가 살아났다는 주목과 적멸궁이 있다. 전각을 빙 둘러 〈법화경〉 여래수량품 게송 12구절이 주련으로 걸려있다.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 방편으로 열반을 나타냈으나, 참으로 멸한 것은 아니고 항상 이곳에 머물며 법을 설하노라. 나는 항상 여기 머물지만 신통력으로 전도된 중생들에게 비록 가까이 있으나 보지 못하게 한 것 뿐. 중생들은 내가 멸도함을 보고 사리를 널리 공양하며 모두 그리워하고 연모하며 우러르는 마음을 내라.’
(爲度衆生故 方便現涅槃/而實不滅度 常住此說法/我常住於此 以諸神通力/令顚倒衆生 雖近而不見/衆見我滅度 廣供養舍利/咸皆懷戀慕 而生渴仰心)

▲ 국내 5대 적멸보궁 중 하나인 정선 정암사의 상징 수마노탑. 보물 제410호다. 세상이 정한 각종 규칙에 얽매인 중생의 눈으로는 볼 수 없었던 모습을 다섯 살 아이의 눈을 통해 볼 수 있었다.
경전을 보면 그 뒤로 ‘중생들이 이를 믿고 정직하게 생활하며 한결같은 마음으로 부처를 보고자 신명을 다하면, 나와 많은 승려들이 함께 영취산에서 나올 것이다. 다시 말하노니 나는 항상 여기 머물러 있고 멸도하지 않았다. 지금 멸함과 멸하지 않음을 방편으로 보였노라’(衆生旣信伏 質直意柔軟/一心欲見佛 不自惜身命/時我及衆僧 俱出靈鷲山/我時語衆生 常在此不滅/以方便力故 現有滅不滅)는 내용이 이어진다.

부처님 진신사리를 봉안한 적멸보궁과 잘 맞아 떨어지는 경구다. 직접 이곳에 오기 전까지 책을 읽으면서 낙산사 가는 도중에 만난 관음보살을 알아보지 못한 원효와 진신석가를 바로보지 못한 효소왕의 일화처럼 ‘이모취인’의 어리석음을 경계하라는 뜻으로 이해했다. 자장율사 관련 행장에는 유독 문수보살이 자주 등장하는데, 문수보살은 지혜를 상징한다. 결국 찾아온 문수보살을 알아보지 못한 것은 온전한 깨달음을 갖추지 못해서이며, 그 원인은 집착과 아상에 있다는 가르침이라고. 하지만 적멸궁 주련과 이어지는 부분을 접하고 나니 정암사는 ‘제법무상 불생불멸(諸法無相 不生不滅)’의 진리 그 자체를 강조하고 있었다.

도난당한 자장율사 가사와 더불어 정암사의 또 하나의 명물, 보물 410호로 지정된 수마노탑으로 향했다. 극락교를 나와 일심교를 건너 산비탈에 난 계단을 따라 오르자 모전석탑이 나왔다. 안동 등지의 모전 탑들이 평지에 있는 것과 달리 절벽 끝에 축대를 세우고 그 위에 탑을 세운 점이 이채롭다. 1972년에 전면 해체ㆍ복원됐는데 이때 5개의 탑지석과 더불어 최하단 적심부에서 사리와 청동함, 은과 금으로 만든 장엄구, 염주, 금구슬 등이 발견됐다. 고려시대 때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며, 현재 모습은 1653년 중건 때 갖춰진 것이다.

〈삼국유사〉에는 수마노탑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다. 정암사에 전해져 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자장율사는 산머리에 탑을 세우려 했는데 세울 때마다 무너졌다.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하니 하룻밤 사이 칡이 세 갈래로 뻗어 나갔다. 칡이 멈춘 곳에 각각 수마노탑, 적멸궁, 요사를 지었다. 또 하나 눈에 띠는 부분은 본래 탑이 세 개가 있었다는 것이다. 금탑과 은탑이 있었지만 감춰져 보이지 않는다고 한다.

적멸궁 주련의 내용이 다시금 떠올랐다. “나는 항상 여기 있다. 다만 전도된 중생들이 보지 못한 뿐. 신명을 다하라. 유멸불멸(有滅不滅)도 방편에 불과하다.”

분명히 존재하지만, 분별을 떠나지 못한 중생들은 볼 수 없다. 갑갑함과 먹먹함이 밀려온다. 순례차 동행한 부모님을 따라 절을 하기 시작했다. 몇 번을 했는지 기억이 가물가물해질 때쯤, 다섯 살 난 아들 녀석이 말했다. “봐요. 탑이 빛나요!” 깜짝 놀라 올려다봤지만, 그대로다. 그런데 이 녀석이 “이리 와 봐요. 빛이 나잖아요”라고 재촉했다. 아들에게 다가가 눈높이를 맞춰 아이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방향을 쳐다 봤다. 해가 탑 상륜부에 걸렸다. 정확히 말하면 아이의 눈과 탑 끝과 해가 일직선으로 섰고, 그 위에 해무리가 떠 있었다.

돌아오는 차안. 아버지가 혼자말로 “그래서 천진불이라고 하나 보다”라고 읊조린다. ‘전도된 중생’이란 ‘고동은 동색이요, 가제는 게 편’이라는 속담처럼 세상 모든 것을 임의로 규정하고, 거기에 맞춰 편 가르려는 인간들의 그릇된 행태를 꼬집는 것은 아닐까. 다섯 살짜리 꼬마가 무엇을 봤는지는 모른다. 다만 그 자리에 함께 있던 순례객들은 그저 묵묵히 서 있는 돌로 된 탑만을 봤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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