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종시대 비선 실세였던 의외 인물, 더 놀라운 사실(오마이뉴스) 2021.01.30 0
 작성자: 정암사  2021-01-31 11:04
조회 : 339  

철종시대 비선 실세였던 의외 인물, 더 놀라운 사실

[사극으로 역사읽기] tvN 드라마 <철인왕후>

            

tvN 사극 <철인왕후>의 배경인 철종시대에는 사실상 2개의 왕실이 공존했다. 이씨 왕실은 권위를 갖고 안동 김씨는 권력을 갖는 이원 구조가 작동했다.

그 당시 이씨 왕실은 실질적 권력을 갖지 못해, 안동 김씨는 형식적 왕권을 갖지 못해 서로가 상대방과의 공존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정조 사망 이후부터 고종 등극 이전까지의 세도정치시대에는 이런 시스템이 항상 유지됐다.

그래서 철종시대에는 이씨의 나라인지 김씨의 나라인지 헷갈릴 수도 있었다. 왕조의 특징 중 하나인 '세습'이라는 양상이 두 가문에서 비슷하게 나타나, 이씨 왕실에서는 형식적 왕권이 세습되고 안동 김씨에서는 실질적 권력이 세습됐으니 그런 느낌을 가질 만도 했다.

그런데 이씨도 아니고 김씨도 아니면서 이 시기 국정 운영을 주도했던 인물이 있다. 이 인물은 공식적인 관직 없이 정치를 좌지우지했다. 이른바 비선 실세였던 것이다. 안동 김씨 실력자 김좌근의 첩인 양씨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tvN 사극 <철인왕후> 한 장면.
 tvN 사극 <철인왕후> 한 장면.
ⓒ tvN
 
비선실세 양씨

양씨의 출생 연도는 강원도 정선군의 정암사 수마노탑에서 찾을 수 있다. 이 탑에서 발견된 탑지석(塔誌石)을 연구한 손신영 고려대 강사의 논문 '정암사 수마노탑 탑지석 연구'(2014년, <문화재> 제47권 제1호)에 따르면, 이 탑에 재물을 시주한 사람들의 명단이 적힌 탑지석에서 "정사년 출생 김좌근"과 함께 "병자년 출생 양씨"가 언급됐다.

김좌근은 1797년 태어났다. 1797년 전후의 병자년은 1756년과 1816년이다. 41세 연상을 첩으로 들였을 가능성은 극히 희박하므로, 양씨는 1816년 생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그런데 그해 병자년 첫날인 음력 1월 1일은 양력 1816년 2월 19일이고, 병자년 마지막 날인 음력 12월 30일은 양력 1817년 2월 15일이었다. 그해 음력 11월 14일부터는 양력 1817년으로 넘어갔다. 그래서 양씨가 음력 11월 14일 이후에 태어났다면, 그의 출생연도는 양력으로 1817년이 된다. 하지만, 그해 병자년의 대부분은 1816년에 걸리므로, 구체적인 자료가 나타나지 않는 한은 1816년 생으로 추정할 수밖에 없다.

고종·순종 시대의 정치비화를 다룬 황현의 <매천야록>에 따르면, 양씨는 전라도 나주 출신이었다. "나주 기생이었다가 좌근의 집에 들어갔다"고 <매천야록>은 말한다. 조선시대 기록에 등장하는 기생은 거의 다 관노비 출신의 관기이므로, 별도의 자료가 없는 한 양씨는 관노비 출신의 나주 관기였다고 이해할 수밖에 없다.

사극에서는 권세가들이 기생을 첩으로 들이는 일이 아무렇지도 않게 묘사되지만, 지금뿐 아니라 옛날에도 공직자들이 그런 행동을 하면 비판을 받기 쉬웠다. 그래서 공직자가 기생을 첩으로 들이는 일이 대담하게 벌어지는 경우는 드물었다.

드라마 <철인왕후>의 김좌근(김태우 분)은 그런 대담한 행동을 할 것 같지 않는 이미지를 풍기고 있다. 하지만 실제의 김좌근은 아주 공공연하게 축첩을 했다. 양씨의 존재가 사료(역사 기록물)에 등장할 수 있었던 것은 김좌근이 관기 축첩 사실을 쉬쉬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김좌근의 권세가 막강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고 볼 수 있다.

양씨가 사료에 등장한 것은 김좌근이 첩의 존재를 감추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양씨가 남편 일에 적극 개입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남편 집안의 가업인 '국정 운영'을 양씨가 적극적으로 거들었던 것이다.

공식적인 왕실은 전주 이씨였지만, 안동 김씨도 어느 정도는 왕실 비슷하게 보였다. 그런 안동 김씨의 첩이 됨으로써 양씨는 후궁과 비슷한 영향력을 갖게 됐다. 이를 바탕으로 그는 철종의 후궁들은 물론이고 철종의 정실부인인 철인왕후도 갖지 못한 막강한 권력을 확보했다.
 
 tvN 드라마 <철인왕후> 한 장면.
 tvN 드라마 <철인왕후> 한 장면.
ⓒ tvN
 
조정 인사권에도 개입

양씨는 국정에 대해 이래라 저래라 간섭했고, 심지어 조정 인사권에도 개입했다. <매천야록>은 "방백과 수령의 다수가 그의 손에서 나왔다"고 말한다. 관찰사와 지방 사또의 임명에까지 입김을 행사했던 것이다. 관직을 청탁하는 사람이 빈손으로 찾아가는 일은 드물었으므로, 양씨의 비자금 규모도 매우 컸으리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런데 양씨는 남편을 거드는 수준에 그치지 않았다. 고종 때인 1885년 개화파에 의해 집필된 것으로 추정되는 <흥선대원군 약전>에 따르면, 양씨와 남편 사이의 무게 중심은 양씨 쪽으로 현저히 기울어 있었다.

"김좌근은 불필요하게 장후(長厚)하고 지혜가 없었다. 나주 기생 양씨를 첩으로 들였는데, 그 여성은 영리하고 지혜로워 총애를 받았다. 국정을 항상 그 첩과 논의하고 결정했으며, 오직 첩이 명하는 대로 따랐다."

'장후'란 표현에서 느낄 수 있듯이, 김좌근은 스케일이 커 보이고 품이 넓어 보였지만 두뇌가 치밀한 편은 아니었다. 양씨는 그 점을 활용해 김좌근의 판단을 좌지우지하고 비선 실세로 성장했다. 안동 김씨가 실권을 쥔 시대였으니, 이 시대의 진짜 실권은 안동 김씨 집안의 '후궁'에게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런 그의 위상을 반영하는 것이 나합(羅閤)이라는 별명이다. 나합은 '나주 합하'의 약칭이다. 총리급 신하에게 붙였던 합하라는 경칭을 붙여도 될 만큼 그의 영향력이 막강했던 것이다. 그는 그런 권세로 왕족과도 허물없이 지냈다. 그가 친하게 지낸 왕족은 흥선군(훗날의 흥선대원군) 시절의 이하응이다.

흥선군은 양씨보다 4년 뒤인 1820년에 태어났다. 흥선군은 왕족이고 양씨는 관노비 출신이었기 때문에, 두 사람 관계에서는 나이라는 것이 중요하지 않았다. 당시 관념으로는 흥선군이 양씨를 하대하는 게 자연스러웠다.

하지만 실제 양상은 달랐다. 훗날 아들이 왕이 된 뒤 '대원위 합하'로 불리게 될 흥선군은 눈앞에 있는 '나주 합하'를 윗사람으로 존대했다. <흥선대원군 약전>은 흥선군이 양씨를 수(嫂)라고 불렀다고 말한다. 형수로도 해석되고 부인으로도 해석되는 '수'로 불렀던 것이다.

이 책에 따르면, 김좌근을 포함해 셋이 함께한 자리에서 흥선군이 장난으로 '수'에게 절을 하는 일도 있었다. 양씨는 그런 흥선군이 마음에 들었다. 그래서 특별한 후대를 베풀었다고 위 약전은 말한다. 김동인의 소설 <운현궁> 속의 흥선군은 안동 김씨한테 상갓집 개처럼 천대를 받지만, 실제의 흥선군은 양씨나 김좌근 등과 매우 친밀하게 교류했다.

사극이나 소설에 묘사되는 것과 달리 철종시대의 흥선군은 존경받는 왕족이었다. 그런 흥선군을 하대하고 장난도 치며 허물없이 지내는 장면은 양씨의 정치적 위상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보여준다.

그런데 양씨와 흥선군의 우정은 그리 견고한 것은 아니었다. 고종이 왕이 되고 안동 김씨가 기운 뒤에 흥선군이 양씨의 소유물을 빼앗은 일이 있었다. <매천야록>에 따르면 1879년에 고종의 서자인 완화군이 죽자 흥선군이 양씨의 묏자리를 빼앗았다고 한다. 양씨가 자기 죽음을 대비해 준비해둔 한양 동대문 밖 묏자리를 빼앗아 자기 손자를 묻었다는 것이다.

안동 김씨가 기운 뒤에는 영향력이 약해졌지만, 양씨는 고종 즉위 이후에도 녹록지 않은 영향력을 과시했다. 이 점은 위의 정암사 수마노탑 탑지석에서 드러난다.

양씨가 수마노탑 보수를 위해 재물을 시주한 것은 순조 탄생 백일을 기념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이 탑 보수를 위한 행사에 양씨만 참여한 게 아니다. 위의 손신영 논문은 "왕과 왕비, 대왕대비, 왕대비, 출궁한 선왕의 빈, 흥선대원군의 부인까지 참여한 왕실 고위층의 사적인 시주에, 나합이라는 죽은 영의정의 애첩까지 참여한 불사"였다고 말한다.


1874년은 "죽은 영의정"인 김좌근이 사망하고 5년 뒤였다. 남편이 죽은 뒤에도 양씨가 왕족들과 함께 행사를 벌이고 시주를 했다는 것은 그의 영향력과 자금력이 고종시대에도 상당 수준으로 유지됐음을 보여준다. 이씨 왕실과 안동 김씨의 이원 구조가 지배하던 시절에 이씨도 김씨도 아니면서 배후 실력자로 등장한 관기 양씨의 정치적 생명력은 그처럼 질기고 견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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